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 (문단 편집) == 인명피해 ==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8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28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20만 여명이다. 전투 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60,000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12,935명,말라리아로 6만명이 추가로 죽었다.[* 참고로 더 많은 포로가 잡혔던 [[유럽]]전선에서 [[미군]] [[포로]] 사망자는 1,124명에 불과하다. 이는 [[나치 독일|독일]]이 서방측 포로에 '''한정해서''' 국제법을 준수하는 합당한 포로 대우를 해준 덕분. 사망자 대부분은 부상 악화, 질병, 아군 폭격에 의한 것으로, [[전쟁범죄]]에 의한 사망은 드물다.[* 단 해당 수치는 포로 수용소에서 수감된 포로 기준이므로 이것이 서방 연합군 포로가 독일군의 전쟁 범죄로 부터 완전히 예외였음을 뜻하지 않는다. 독일군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가짜 항복과 포로 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 악명높은 [[말메디 학살]]과 [[그래뉴 학살]], [[르 파라디 학살]], 발하우젠 학살 등 포로가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에 현장에서 즉결 처형된 사례는 상당수 존재한다. 흔하지는 않았으나 수용소에서도 소규모 단위로 포로가 뚜렷한 이유 없이 처형된 사례도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방 연합군의 포로가 된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1% 미만으로 극히 낮았으나 수용소로 보내지기 이전에 현장에서 처형된 독일군 포로의 수는 연합군 포로 수용소 사망률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독일 국방군|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인간 취급도 안했다.]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 병력 피해는 '''일본이 [[루손]]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전쟁 [[미군]] 전사자 20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s-2]]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태평양전쟁 내내 미군이 쓰던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섬]]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자"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Leapfrogging, Island hopping) 라 불렸다. [[더글라스 맥아더]]를 위시한 [[미 육군]]은 '이건 [[미 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라고 까고, 미 육군 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 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쨌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이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단단히 방어하고 있는 섬 주위의 섬을 미군이 점령하고 보급로를 끊어버리니, 일본군의 요새 작전은 자기들이 알아서 몰락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보급로가 바다였고, 강력한 해군으로 제해권을 먹은 '''[[미군]]이니까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3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1945년 패전까지 입은 피해는 전사 및 실종자. 포로 사망자만 도합 100만여 명에 달했다.[* 대부분의 피해는 [[미군]]과 싸우다 발생한 것. 민간인 사망, 실종자는 46만여 명 정도.]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 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으로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 그래도 동원 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제국]]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일본이 병력 동원 측면에서 반란의 우려 때문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조선]]과 [[대만]] 출신 병사를 매우 꺼리며 받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며 태평양전쟁의 전역이 점점 넓어져가던 1943년까지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의 일본군 입대 자원자 중에 실제로 선발된 인원의 비율은 채 5%가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선발한 식민지 출신 병사들도 [[전투병]]과에는 철저히 배제시키고 [[비전투병]]과 위주로 배속시켰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운운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키는 식으로 적극적인 [[민족말살정책]]까지 펴놓고도 반란을 우려해서 입대를 불허하는 모순의 극치였던 것이다. 물론 대전 말기가 되어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이 턱 밑까지 다가오자 결국 방침을 바꿔서 조선인과 대만인들도 강제징집해 전선에 밀어넣고, 의무교육제도 및 선거권 도입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동화정책에 나섰으나 너무 늦어버렸고, 그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난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당시 심각한 혼란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도 굶주리는 빈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 제국|일본]]의 침략까지 당해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 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으니 얼마나 많이 죽었을지는 뻔한 이야기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 폭격, 전쟁 기간 기아와 질병 등으로 군인 375만 명을 포함하여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2,200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 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00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전선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특히 [[독소전쟁]]을 제외하면 주로 전투 사망자가 다수인 유럽전선과 달리, 태평양전선은 [[아프리카]] 지역의 [[내전]]만큼이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부유하던 청나라 멸망 후 폐허가 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홀로코스트]]처럼 체계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나 [[임진왜란]][* 여담으로 임진왜란이 패전국인 일본이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이익을 얻은 전쟁인 반면, 태평양 전쟁은 패전국인 일본이 해당 전쟁으로 민주화 외에는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한 케이스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 일본이 이익을 얻은 전쟁은 일본이 직접 참전하지도 않았던 후술할 6.25 전쟁이다.]처럼 전근대의 전쟁처럼 점령지에서 [[약탈]]/[[살해]]/[[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으로 일본 자신조차 전쟁범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태평양 전쟁만큼은 아니라도 수백만 명씩 죽고 다친 [[국공내전]]과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정확한 피해 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태평양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최근에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참상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나, 사실 세계적으로 힘을 과시할만한 아시아 강국들 입장에선 "태평양 전쟁" 자체가 중요한거지 미국과 일본이 치고받은 "태평양 전선"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그보다도 중일전선과 국공내전, 6.25,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하게 부각하는지라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참상을 물을 때를 제외하곤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여전히 크다.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이다. [[소련군]] 포로는 30~57.5% 이상이 사망했고[* 70%까지 잡는 견해도 소수 있으나 [[러시아]]측 학자들도 대부분 57% 이하로 본다. 70%까지 잡는 경우는 "포로로 잡혔던 사람 중 [[ 나치 독일|독일]]의 항복 이후 [[소련]]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죽은 사람도 상당수가 포함되어서 나온 수치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소련군이 독일에 항복한 포로들을 포로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해서, 자국 범죄자나 형벌부대 처분 대상자보다도 더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 물론 그것을 감안해도 [[일본 제국|일본]]보다 높은 수치인 건 맞다.]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 단,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 독일]]이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 독일군도 전쟁 동안 일본군과 매우 유사한 시스템의 위안소를 운영했으며 점령지의 여성들을 납치 또는 취업 사기로 강제 동원하여 성노예로 학대하였다. 피해 여성 대부분은 소련 등의 동유럽 국가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나치 독일이 비교적 인종적으로 우위로 여긴 지역 출신 여성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해당 위안소를 이용하는 독일군 장병들에게 성병 키트와 설문지가 보급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할 정도로 명명백백하게 체계적으로 벌여진 짓이라는 점에서 일본군의 위안부와 매우 비슷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독일군의 위안소 피해 여성 대부분은 전후에 침묵을 택했다는 점이다.]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 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 참고로 이건 독일 측 보고서에서 나온 수치인데, 이런 범죄 행위를 가해자가 고의로 부풀릴 가능성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실제로도 저 정도가 벌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범죄로 인식을 했다면 말이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